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만드신 생물들에 대해서 아담이 각각의 이름을 지어줍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아담이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존재를 규명하고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첫째, 이름은 존재를 정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름은 자신의 정체성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이름은 나와 다른 사람을 구분합니다. 그래서 동질과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셋째, 이름을 통해서 사회를 구성합니다. 자신과 타인을 구분함으로서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아담에게는 충분한 이성과 감성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의미를 파악해 나가면서 동시에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여기 아담의 외로움의 정체는 자신과 짝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세계 속에서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사건입니다. 사람이 자기에게 알맞는 돕는 사람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실존적 외로움입니다. 여기 "돕는 사람"이란 예수님이 말씀하신 "선한 이웃"도 포함될 수 있지만 "평생을 같이할 적합한 베필"(suitable helper)을 뜻합니다. 또한 "돕는 사람"은 열등하거나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이란 뜻을 알려면 "You Complete Me!"라는 대사로 유명한 "제리 맥과이어"라는 영화를 보기 바랍니다. 힌트는 탐 크루즈가 온갖 고생을 다 해서 성공한 그 자리에 정작 자신과 모든 고생을 함께한 르네 즐위거가 함께 있지 않자 한달음에 달려가서 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채워줄 수 없는 아담의 외로움의 실체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남자에게서 취하였은 즉 여자라 하리라."는 말은 남자와 여자는 따로 떼어내거나 따로 생각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남성의 정체성은 여성에 의해서 규정되고 여성의 정체성은 남성에 의해서 규정됩니다. 그러므로 남성과 여성은 서로의 성별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성을 통해 사람을 온전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오늘날 양성평등의 인권을 부르짖는 사람들의 주장은 실제로는 양성의 중성화입니다. 이는 남성과 여성을 젠더라는 사회적 성별로 거세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주장 뒤에 동성애를 필두로 하는 인간의 온갖 성적 욕망을 일반화하려는 죄성이 숨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의 문제는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잘 살펴야만 합니다. 동시에 정상적인 가정들도 잘 살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정상적인 가정들도 이혼의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가정이 먼저 올바르게 서 있어야만 합니다. 성도들의 가정의 문제를 성경적으로 해결하려면, 가장 먼저 서로에게 적합한 돕는 베필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서로가 적합하게 돕는 배필이 되었을 때 서로에게 부끄러움과 감출 것이 없습니다. 벗었지만 부끄럽지 않다는 것은 성적인 무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성과 감성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서로에게 충실하여 안정되어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가정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울타리를 치고 견고하게 가정을 지켜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가정이 되어야 "벗었으나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는 부부"가 될 수 있습니다.